키오스크 앞에 서면.. 노인은 울고 싶다.

분47초가 걸렸다. 그것도 동행한 기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얼마나 더 걸렸을지 장담할 수 없다. 식당에서 먹고 싶은 음식을 고르는 세상 간단한 과정이 이렇게 험난할 수 있을까.

게티이미지뱅크

26일 오전 11시 레몬과 감귤 농장 일을 마치고 한 식당 탁자 위 ‘키오스크(터치스크린 방식의 무인 단말기)’로 점심을 주문하려던 농민 양석필씨(71·제주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가 당장 마주한 냉엄한 현실이다.

언제부턴가 그가 종종 방문하던 고기국수 식당에 기이한 물건이 들어왔다. 종업원 대신 주문을 받는 키오스크가 식탁마다 설치됐다. 워낙 지역주민과 관광객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라 인건비와 주문 소요 시간을 줄이려 설치한 것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종업원이 키오스크로 주문해달라고 하자 양씨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걸 한번도 써본 적이 없는데 화면을 만지면 되는 건가. 눈도 침침하니 글씨가 제대로 보여야 말이지.”

이내 손가락으로 기기를 접촉하자 ‘세트 메뉴’를 고르는 화면이 나왔다. 고기국수와 멸치국수를 단품으로 선택하려 했는데 세트 메뉴만 보이자 그는 한동안 정지화면이 된 듯 멈췄다. 기자가 식사류라 써진 글자에 손을 대야 한다고 알려주자 겨우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주문단계에서도 장벽을 실감해야 했다. ‘장바구니’를 눌러야 ‘주문하기’가 나오는데 처음 사용하는 터라 몇번을 뒤로 갔다 돌아오기를 반복해서야 ‘주문이 완료되었다’라는 기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생경하고도 무시무시한’ 키오스크가 식당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커피전문점·빵집은 물론 대중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버스터미널과 병원에도 속속 들어섰다. 그럴수록 기계 사용에 익숙지 않은 고령 어르신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든다. 시대 흐름에 따라 생활양식이 변하는 사이 이를 미처 따라잡지 못한 어르신들은 그저 세월이 야속할 뿐이다.

양씨 역시 키오스크 탓에 생활이 불편해지고 있다고 토로했다.

“키오스크가 설치된 곳은 꺼리게 되더라고요. 사용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기계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기도 하고요. 괜히 위축된다니까요. 그래서 가게에 들어갈 때 있나 없나 먼저 확인하는 버릇마저 생겼어요.”

키오스크와 불편한 합석을 하게 된 점심을 마친 후 그는 도내 한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그는 교통사고 후유증을 치료하러 두달에 한번 이곳을 방문한다. 오후 2시쯤 함께 찾은 병원 1층 한쪽엔 접수와 수납을 돕는 키오스크 여러대가 늘어서 있었다. 양씨는 “평소 아들과 함께 병원을 찾아 키오스크를 쓸 일이 없었다. 혼자 내원했더라면 키오스크보다는 창구 대기표를 뽑았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병원 키오스크 앞에 선 양씨는 국숫집에서와 달리 비교적 수월하게 주민등록번호를 누르고 접수를 마쳤다. 그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안도감을 내비쳤다. 글씨가 큰 데다 선택해야 할 경로가 상대적으로 단순해서였을까.

“병원 키오스크는 글씨가 크고 선택지가 2∼3개밖에 안돼서 쉽게 따라갈 수 있었어요. 다른 기기들도 중장년층을 고려해 누구나 쉽게 따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줬으면 좋겠어요.”

그럼에도 병원을 찾은 다수의 어르신은 키오스크보다는 창구를 선호하는 모습이었다. 키오스크 앞에는 안내 직원 2명이 배치돼 있었지만 대부분 한산했다. 반면 같은 시각 창구에서 접수·수납 업무를 진행하려는 대기 인원은 17명에 달했다. 예상 소요 시간만 8분. 키오스크를 이용했다면 훨씬 짧은 시간에 원하는 업무를 봤을 것이다.

‘디지털 까막눈’ 없게 하려면…“조작 쉬운 기기 도입을”

양석필씨가 제주 제주시에 있는 한 국수 전문점에서 키오스크를 이용해 음식을 주문하고 있다.

아직까진 양씨가 찾은 병원처럼 무인과 유인을 병행해 운영하는 곳이 꽤 있다. 다만 이런 과도기가 지나면 키오스크를 앞세워 완전 무인화를 선언하는 곳이 다수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옆에서 사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는 한 키오스크는 어르신들에게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로 다가온다.


어르신의 발이 돼주는 버스터미널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전북 전주시외터미널은 코로나19 여파로 승객이 감소함에 따라 창구 직원 수를 3명에서 1명으로 줄였다. 그 대신 키오스크가 10대까지 늘었다. 기기 사용을 도와주는 봉사원이 2명 있지만 현금을 자주 쓰는 어르신은 직원이 1명밖에 없는 창구로 향하기 일쑤다. 전주의 한 병원에 들렀다 버스를 타고 진안으로 돌아간다는 송덕기씨(76)도 창구 직원에게서 표를 구했다.


“기계를 쓰다가 잘못돼서 표가 안 나올 것 같기도 하고, 현금을 많이 쓰는데 대부분의 기계는 신용카드만 받아서 그냥 터미널 직원에게 가는 거죠. 그런데 일하는 사람이 1명으로 줄어서 기다리는 시간이 곱절로 늘어났어요.”


강원 춘천시 동내면에 사는 서재주씨(74)는 최근 지인 결혼식에 갔다가 악몽 같은 일을 겪었다. 예식장 주차장에서 빠져나오려는데 사람은 없고 무인 결제 단말기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던 것. “한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몰라 10여분간 기계와 씨름을 했지요. 다행히 뒤에 온 다른 차량 운전자에게 도움을 청했어요. 내가 주차장에서 마지막으로 빠져나간 사람이었다면 아예 탈출을 못했을지도 몰라요.”


키오스크를 도입했다가 지금은 아예 기기를 꺼버린 식당도 있다. 키오스크로 주문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 이같은 촌극이 빚어진 것이다.


충남 홍성 내포신도시에서 아귀찜 식당을 하는 임채석씨(66)는 “인건비를 좀 아껴보려고 키오스크를 들여놨는데 사용하는 게 복잡하다며 손님들이 죄다 종업원을 불러 음식을 주문하더라”면서 “큰맘 먹고 여러대를 구매했는데 계륵이 돼버렸다”고 했다.


키오스크 도입은 노동집약적인 요식업계에서 특히 활발하다. 전국에 아이스크림 매장 1500여개를 운영하는 대형 프랜차이즈 B사는 2018년부터 ‘해피스테이션’이라는 이름의 키오스크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1270여곳(전체의 85%)에 키오스크를 뒀다. 키오스크가 없는 매장을 찾기가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사회적 약자는 물론 소비자 편의를 높이는 차원에서라도 ‘조작이 쉬운 키오스크’를 도입하려는 민간부문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사용자 중심으로 소프트웨어를 표준화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안세련 한국소비자원 시장조사국 팀장은 “불편을 초래하는 키오스크를 섣불리 도입했다간 자칫 다수의 소비자로부터 원성을 살 수 있다”면서 “고령층만 쓰게 하는 기기를 별도로 둔다든지, 화면의 어떤 부분을 만져야 하는지 표시해주는 기능을 넣는다든지 등의 노력을 기울인다면 사회적 약자의 키오스크 접근성을 좀 더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B사 마케팅 관계자 역시 “최근 몇년 새 해피스테이션을 급격하게 도입하면서 불편함을 호소하는 민원이 꾸준히 나온다”면서 “디지털 약자를 보호하도록 점주 교육을 강화하는 한편 내년 상반기에는 사용자의 의견을 모아 사용자 경험(UX), 사용자 상호작용환경(UI) 수준을 높이는 쪽으로 대대적인 기기 개선에 나서겠다”고 강조했다.


기자와의 동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 양석필씨는 키오스크 앞에서 당당해지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나 같은 나이 많은 사람도 컴퓨터는 못 켜도 스마트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다루거든! 천하의 키오스크라고 다를 게 있겠어요. 나라에서 우리 같은 약자들을 외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교육해주고, 기기 다루는 데 능숙한 젊은 친구들이 옆에서 조금만 도와준다면 금방 배울 수 있을 거예요. 디지털 세상에서 나만 소외될 순 없잖아요. 하하.”


제주=심재웅, 전주=박철현, 춘천=김윤호, 홍성=서륜, 이문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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