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 싹튼 ‘찾아가는 돌봄’…정든 내집서 치료·요양해요
광주의 ‘취약층 통합돌봄’ 사업
노인·영유아·장애인 등 대상…방문진료·건강지원 서비스
“통합돌봄 관건은 병원 참여…자치단체, 적극 지원해야”
지난 16일 광주시 광산구 우산동 한 영구임대 아파트를 찾아 임형석 우리동네의원 원장이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정대하 기자
“엄니, 안 추우셔요?”
지난 13일 광주 서구 쌍촌동의 서민 아파트를 찾은 왕진 의사가 현관문을 열며 큰 소리로 인사말을 건넸다. 거실 침대에 누워 있던 정순자(가명·83)씨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흰 진료가운을 입고 정씨 집을 찾은 이는 광주 첨단가족연합의원 김경현(43) 원장이다. 그는 이날 문소은 간호사, 문순정 사회복지사와 함께 방문진료에 나섰다. 정씨의 남편(90)은 “교통사고를 당해 7년째 거동을 못 한다. 병원까지 데려가는 게 큰일이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여기까지 와주시니 너무 고맙다”고 했다. 김 원장이 정씨의 혈압과 맥박, 당 수치 등을 재고 최근 식생활과 건강상태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김 원장이 검진 가방을 들고 환자를 찾아 나선 건 지난해 하반기부터다. 광주 서구가 지난해 7월 보건복지부 시범사업에 선정돼 재택 의료센터를 마련한 뒤 공모를 통해 부부 의사인 김 원장과 문서정 원장을 왕진 의사로 위촉했다. 김 원장 부부는 오전에는 의원에서 진료업무를 보고 오후에는 교대로 방문진료에 나선다.
김 원장이 이날 오후 1시부터 5시30분까지 방문진료를 한 환자는 11명이다. 서구에 거주하는 ‘와상환자’(침상에 누워 생활하는 환자) 150명이 방문진료의 혜택을 받고 있다. 김 원장은 “다음달(4월)부터는 동·남·북·광산구에 사는 노인 환자 80여명을 추가로 방문진료하게 된다”고 했다.
지난 13일 오후 광주시 서구 쌍촌동 한 서민 아파트로 환자를 찾아간 김경현 원장이 방문진료를 하고 있다. 정대하 기자
김 원장이 하는 방문진료는 광주 서구가 2019년부터 시작한 ‘지역사회 통합돌봄’(커뮤니티 케어) 사업의 연장이다. 지역사회 통합돌봄은 돌봄이 필요한 지역주민이 거주지에서 일상생활을 하며 방문돌봄과 의료서비스를 받게 하는 시스템이다. 2018년 건강보험법 개정으로 방문요양급여가 신설되면서 방문진료(의사)·방문의료(의료인력)가 가능해졌다. 광주 서구 등 전국 16개 자치단체가 보건복지부의 ‘통합돌봄 선도사업’(2019년 6월~2022년 12월)에 참여해 현장 경험을 축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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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복지부는 1년 동안의 시범사업에 대한 성과평가에 근거해 올해 하반기부터 ‘노인 의료·돌봄 통합지원 2단계 시범 사업’을 시작한다. 광주 서구·북구 등 12개 자치단체가 2025년 12월까지 사업을 펼친다. 1단계 사업을 두고 ‘경증 환자 위주로 일회성 진료를 한다’는 지적이 있어 2단계 사업에선 장기요양 재가급여자, 급성기 요양병원 퇴원환자 등 재가치료와 요양병원(시설) 입원치료의 경계선상에 있는 75살 이상 노인들이 주요 진료 대상이다.
박용금 광주 서구 돌봄정책팀장은 “1단계 시범사업 땐 방문진료 사업에 응모한 의사가 적어 어려움을 겪었지만, 2단계 시범사업에선 의사 2명이 추가로 참여해 제대로 된 ‘방문의료지원센터’ 체계가 구축된다”고 설명했다. 보건복지부는 2025년까지 우리 실정에 맞는 의료·돌봄 연계 통합지원 모델을 정립해 2026년부터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목표다.
김경현(가운데) 첨단가족연합의원 원장 등 방문진료 팀. 정대하 기자
장애인·노인 등 취약계층에 대한 사회적 돌봄 서비스는 민간 조직에서도 제공하고 있다.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료사협)이 그것으로, 1994년 무의촌 지역에 의료기관을 세우려고 연세대 학생들과 주민들이 설립한 안성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 시초다. 현재 전국에 의료사협 27개가 운영되고 있다. 27개 의료사협의 연합체인 ‘한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에 소속된 전체 조합원은 5만4199명에 이르고, 직원은 3060명(2022년 1월 기준)이다. 하지만 의료사협에 참여하는 의료진은 전국적으로 의사 46명, 한의사 24명, 치과의사 17명이 전부다. 광주 광산구에 있는 우리동네의원 임형석(50) 원장도 그중 하나다.
광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 2021년 8월 설립한 우리동네의원 임형석 원장 등 직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광주의료사협 제공
지난 16일 오후 임 원장은 홀몸노인 안화순(가명·75)씨와 면담을 위해 광주 북구 우산동의 한 영구임대 아파트를 찾았다. 방광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인 안씨는 그동안 콩팥에 연결해 놓은 의료기기를 소독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병원을 찾아왔다. 안씨는 “가까운 동네 병원이지만, 지팡이 짚고 걸어가려니 힘들다. 같이 가줄 사람도 없어 너무 서럽다”고 하소연했다. 임 원장이 안씨의 손을 잡고 “내일 혈액검사를 한 뒤 콩팥 수치를 점검하고, 기기 소독까지 해드리겠다. 더는 의원까지 걸어가지 않으셔도 된다”고 안씨를 안심시켰다.
임 원장이 일하는 우리동네의원은 광주의료사협이 2021년 8월 설립한 1차 의료기관이다. 조합원이 1018명인 광주의료사협은 장애인 건강주치의 시범사업과 광산구 통합돌봄사업 등을 맡아 하면서 120명이 넘는 노인·장애인 환자를 방문진료하고 있다. 조선대병원 종합검진센터 운영실장으로 있던 임 원장은 의대 교수를 그만둔 뒤 왕진 의사가 됐다. 임 원장은 “방문의료 서비스가 활성화되려면 방문진료 수가의 합리적 조정과 방문진료 코디네이터 지원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광주시 광산구 영구임대 아파트를 찾아 방문진료를 하는 임형석 우리동네의원 원장. 정대하 기자
지역 돌봄 복지망을 한층 촘촘하게 짜는 것은 광주시의 올해 역점 사업이다. 이른바 ‘광주다움 통합돌봄’ 서비스다. 102억원이 투입되는 이 사업은 노인·영유아, 아동·청소년, 장애인, 1인가구 등을 대상으로 한다. 통합돌봄 대상을 65살 이상 노인에 한정하는 다른 자치단체들과 달리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생애 주기 전체로 서비스를 확대한 것은 광주시가 처음이다. 다음달 1일부터 개통되는 ‘돌봄 콜’(1660-2642)로 전화하면, 5개 자치구의 97개 동 행정복지센터 사례관리 담당자(368명)가 현장을 방문해 신청자가 필요로 하는 돌봄 서비스가 무엇인지를 판단한다.
시는 신청자들에게 가사, 식사, 동행, 건강 지원, 안전 지원, 주거 편의, 일시보호 등 7가지 서비스 중 적절한 것을 맞춤형으로 제공할 계획이다. 김경명 광주시 복지혁신팀 주무관은 “방문 요양서비스의 1인당 한도는 연 150만원이다. 하루 6시간 돌봄이 필요한 노인의 경우 정부의 재가노인 방문요양 하루 3시간 외에 광주 플러스 돌봄 서비스를 신청하면 하루 3시간 요양서비스를 추가로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역사회 통합돌봄 사업의 관건은 의료기관들의 참여다. 임형석 원장은 “방문진료를 담당할 1차 의료기관과 2차 종합병원들 사이에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그래야 병원에서 퇴원한 고령 환자들이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도, 요양원에 가지 않고도 정든 집에서 치료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광주 광산구처럼 자치단체가 의료사협의 방문진료 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다. 우세옥 한국의료사협연합회 상임이사는 “의료사협이 ‘사무장 병원’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있다. 특정인들만 가입하도록 하는 ‘가짜 의료사협’을 걸러낼 수 있도록 한국의료사협연합회에 일정한 지도·관리 권한을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의료복지 전문가들은 의료사협이 비영리법인인데도 농협처럼 법률에 근거해 만들어진 협동조합과 달리 법인세 감면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는 지난달 11일 서울에서 총회를 열었다. 한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 제공
지역에서 의료·보건·복지·주거의 통합형 지원체계를 제공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일본의 경우 ‘지역포괄케어 지원센터’를 지역 곳곳에 설립해 창구에서부터 의료·돌봄 서비스를 연계해 지원하고, 다기능 소규모 ‘지원주택’을 마련해 치매환자 5~10명을 야간에도 돌보고 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