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선택, 다른 조건… 두 노인으로 보는 안락사
[리뷰] 영화 < 플랜 75 >와 <룸넥스트 도어>로 보는 죽음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첫 영어 장편 영화인 <룸넥스트 도어>와 가까운 미래의 일본을 다룬 하야카와 치에 감독의 < 플랜 75 >는 죽음, 그것도 안락사에 대해 다루고 있는 영화이다. 두 영화의 주인공 마사와 미치는 서로 다른 조건에서 죽음의 선택에 이르게 되는데 조건의 차이는 주인공 주변의 색감과 빛으로도 대비된다. 그리고 영화 내내 그들의 선택을 마지막까지 함께 좆아 가다보면 ‘인간의 존엄은 어떻게 지켜질 수 있는가’에 대해 깊은 고민에 다다르게 된다.
영화 <룸넥스트 도어> 속 마사는 종군기자로 죽음을 매일 같이 직면하며 살아왔으며 많은 책을 썼다. 그의 고급 아파트에는 유명한 사진과 작품들이 곳곳에 놓여있고 그를 둘러싼 풍경들은 선명한 색채로 일렁인다. 그가 삶에서 가장 풀기 어려웠던 문제는 미혼모로서 낳은 딸과의 관계이며 딸과 그는 타인보다 못한 사이이다. 그것만 제외한다면 마사의 삶은 그가 선택한 대로 이어졌다.
반면 < 플랜 75 >의 주인공 78세 여성 미치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들은 낡은 필름처럼 흐릿하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듯 칙칙하다. 호텔에서 성실하게 메이드로 일하고 있는 미치는 가족이 없다. 어느 날 그는 티브이 뉴스를 통해 플랜 75법이 통과되었다는 뉴스를 듣는다.
고령화 문제가 노인 혐오를 낳고 노인들을 향한 청년 세대 범죄가 급증하자 일본의회는 75세가 넘은 노인들에게 죽음의 선택을 합법적으로 보장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죽음을 선택하는 이에게는 10만 엔(약 90만원)의 현금이 지원되고 죽음의 날까지 일정 횟수 일정 시간의 전화 상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공무원들은 거리에서 정책을 홍보하고 신청을 받기도 하는데 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장소는 무료 급식소이다.
마사와 미치, 두 사람은 모두 죽음에 직면해 있다
자궁경부암 3기 선고를 받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마사는 죽음이 닥쳐오면 삶에 구질구질하게 매달리기보다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며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것이 그가 선택한 싸움의 방식이다. 종군기자로서 죽음이 일상이었던 마사에게 죽음은 삶의 필연이었기에 죽음에 대한 사고는 결코 가볍지 않다. 병원은 1차 치료가 효과가 없자 그에게 더 독한 치료, 혹은 다른 치료를 받도록 강제한다. 처음 치료가 실패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마사는 화를 내며 의료시스템의 설득에 따라 치료를 받았던 것을 후회한다. 그리고 자발적인 죽음을 준비하면서 다크웹에서 필요한 약물을 구하고 죽음의 순간에 옆에 있어줄 사람을 찾는다.
남보다 더 못한 관계의 딸에게 부탁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다른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거부당한 그 부탁은 한 때 잡지사에서 같이 일하면서 매우 친밀했지만 한동안 소원해진 잉그리드에게 전해진다. 자신의 책 출간 기념 사인회에서 우연히 지인으로부터 마사의 투병 사실을 알게 되어 병문안을 갔다가 마사와 시간을 함께 보냈던 잉그리드는 갑작스럽게 다가온 무거운 부탁에 고민하지만 결국 그 부탁을 수락한다.
마사가 생의 마지막 장소로 선택한 곳은 자연 속에 둘러싸인 매우 쾌적한 교외 별장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걸려있고 통창으로 바깥 자연이 그대로 실내로 들어오는 그곳의 한 달 임대료는 서민들에게는 엄두를 내기 어려운 금액이다. 야외 발코니에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 등장하는 선베드가 더 원색적인 색감이 입혀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마사는 그곳에서 새소리와 햇빛, 나무들의 실루엣을 강렬하게 느낀다. 곁에 있는 잉그리드는 책과 취재 현장이었던 전장과 과거 둘의 연인이었던 남자, 딸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나누면서 삶을 하나하나 꺼내서 펼쳐 보이기에 누구보다 맞춤한 친구이다. 깊은 병에 걸린 엄마에게 ‘당신의 일’이라며 외면하는 딸의 존재를 제외한다면 그의 마지막은 완벽해 보인다.
죽음에 대한 미치의 선택은 마사와는 전혀 다른 조건에서 이뤄진다. 78세의 미치는 병이 없고 여전히 일하길 원하며 육체적으로도 일할 수 있다. 미치가 일하는 호텔의 메이드 노동자들은 그와 비슷한 또래들이다. 하지만 어느 날 고령의 동료 노동자가 갑자기 쓰러지면서 회사는 손님들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고령 노동자들을 해고한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고 가족이 없는 미치는 직장을 잃고 동시에 거주하고 있던 작은 아파트에서 나가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미치는 생활보호대상자가 되기보다 노동할 수 있는 한 자신의 노동으로 스스로를 책임지려할 만큼 자존감이 높지만 일자리는 쉽게 구해지지 않으며 목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집을 구하기도 어렵다.
곳곳에서 홍보되는 플랜 75 정책을 바라보는 미치의 심정은 착잡하다. 하지만 머물 공간이 불안정하고 일자리가 없고 가족이 없는 미치의 선택지는 죽음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결국 플랜 75 신청서에 서명을 마친 미치의 마지막을 함께 하는 이는 국가에서 제공하는 전화 서비스 상담자인 젊은 여성 요코이다. 상담사의 역할은 플랜 75 신청자들이 죽음이 집행되기 전까지 선택을 번복하지 않도록 하는 것에 한정되며 상담사가 죽음을 앞둔 노인과 그 이상의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도록 잘 짜여진 매뉴얼이 만들어져 있다.
전화 상담 시간과 횟수는 제한되어 있으며 대면 접촉은 금지된다. 상담사는 죽음을 앞둔 이의 마음에 깊게 공감하거나 슬퍼하기보다 기계처럼 상태를 질문하고 과거 얘기가 나오면 듣는 정도의 역할만 하게 된다. 하지만 미치의 부탁으로 전화선을 넘어 직접 미치를 만난 후 요코의 마음에는 작은 파문이 일렁인다. 어느새 요코는 미치를 얼굴이 없는 플랜 75 신청자가 아니라 구체적인 형상과 마음을 가진 존재로서 미치를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마사는 원래 계획한 대로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간다. 눈에 잘 띄는 샛노란 빛깔의 쟈켓과 붉은 립스틱은 죽음을 향해 나가는 그에게 갑옷과 같다. 그는 생의 마지막을 화려한 빛깔의 향연이 되게 기획한다.
반면 미치는 국가가 생의 마지막 용돈으로 쥐어준 10만 엔을 사용하지 못한다. 자신에게 근무시간이 아님에도 시간을 내준 요코에게 고마움으로 얼마간의 돈을 건네고 나자 딱히 그 돈으로 할 일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 기계적인 절차에 따라 컨베이어 벨트에 실린 물건처럼 죽음의 저편으로 내던져지는 순간 미치는 그곳을 휘적휘적 빠져나온다. 하지만 그곳을 빠져나와 다시 마주한 세계는 여전히 무거운 회색의 안개에 짙게 둘러싸여 있다.
마사의 전 애인이자 기후위기 강연자인 데미언은 마사와 잉그리드가 머문 장소에 강연을 왔다가 잉그리드와 만나 식사를 나눈다. 그는 사람들이 옳은 일을 할 것이라는 믿음을 잃은 지 오래이며 세계가 기후위기에 눈감고 종말로 향해 가는 세태에서 손주의 탄생조차 환영하지 못할 만큼 냉소적이다. 잉그리드는 삶을 냉소하는 데미언에게 비극 속에서도 사는 방법은 많다며 마사의 삶에서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자존감이 강한 마사와 미치의 삶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고통 속에서 죽어갈 것이 예정된 삶에서 마사는 굴욕스러운 고통이 아닌 존엄한 죽음을 선택했다. 그 선택은 막다른 생의 골목에 서서 어쩔 수 없이 죽음 의향서에 서명한 미치의 선택과는 사뭇 다르다.
미치의 조건은 부양자 없는 노인의 빈곤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 국가가 권고한 죽음의 길에는 인간에 대한 예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사가 죽음의 과정 동안 누렸던 사람의 온기, 자연의 풍경과 새소르 등은 어디에도 없다. 미치를 둘러싼 것은 지독히도 황량한 잿빛 풍경이다.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사회지만 각각의 구체적인 삶이 존재한다. 이웃과 나누는 따뜻한 우애, 불의에 분노하고 그것을 바꾸기 위한 실천, 우리와 깊이 연결된 자연과의 단단한 연대, 고통을 직면하고 고통 속에서도 살아내겠다는 의지. 하지만 경제적으로도 지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풍요로운 마사와 달리 가난한 노인 미치의 구체적인 삶은 없어져야할 것으로 부정당한다.
죽기 직전 마사의 붉은 입술, 샛노란 의상을 보면서 미치의 얼굴과 그의 옷을 떠올려보지만 막막함 속에 관객들을 응시하던 그의 눈 빛 외에 그가 입었던 옷이 기억나지 않았다.